본 교육연구단의 참여대학원생이었던 권은채(석사) 씨의 발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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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살아남은 자’의 페미니즘…“윤석열 정부, ‘생존’은 정치적 전쟁”
등록 :2022-06-25 09:00수정 :2022-06-2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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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기획ㅣ‘강남역 세대’의 페미니즘
선배없는 ‘페미니즘 독학’ 세대…분화·갈등 속 활로모색
“나 자신을 돌보는 게 정치적 전쟁” 일상 연대 불씨 찾아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은 자기 방종이 아니라 자기 보존이며, 정치적 전쟁 행위이다.”
미국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작가 오드리 로드(1934~1992)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30년이 지난 어느 날, 멀고 먼 한국의 여성학회에서 여러 발표자가 우연히 자신의 말을 거듭 인용한 것을 안다면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21세기에도 여전히 누군가 스스로를 돌보는 일을 ‘정치적 전쟁’ 치르듯 해야 하는 일을 개탄했을지도 모른다.
2016년 강남역 사건 뒤 6년,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우며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선언한 윤석열 정부 시대의 막이 오르고 페미니스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생존’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18일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 법학관에서 연 한국여성학회(회장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춘계학술대회에서는 이를 놓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팬데믹, 기후위기, 그리고 페미니즘’이란 제목의 이번 학술대회는 2년 반, 햇수로 3년 만에 열린 전체 대면행사로 250여명이 참여했다.
특히 이날 오후 마련된 라운드테이블 ‘강남역 세대 여성들이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방식’에는 젊은 대학원생 신진 연구자들이 대거 발표에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은 2010년대 페미니즘의 재부상(페미니즘 리부트)과 대중화의 기폭제가 된 사건으로, 청년세대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집단적 경험으로 꼽힌다. 더욱이 지난 대선 국면 반페미니즘 의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능력주의 논리가 점점 굳건한 성채를 쌓아올리는 가운데 여성 청년들의 생존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공감대 속에 마련된 자리였다.
‘선배’는 멀고 ‘온라인’은 가까워
“강남역 사건 이후 등장한 ‘페미니즘 리부트 세대’는 윗세대와의 단절을 경험한 세대이다. ‘선배 없는 페미니즘’이라 정의되기도 한다.”
20~30대 페미니스트들은 누구한테서 페미니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페미니즘을 ‘독학’했다고 말한다. 대학생 시절부터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을 하면서 ‘선배’들에게서 운동을 ‘학습’하고 다른 남성 선후배들과 평생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가며 조직이나 계파에 소속되었던 기존 여성 정치인들과는 출발부터 다르다는 얘기다. 진보정당의 젊은 여성 정치주체들을 연구한 배수정(성공회대 실천여성학)씨는 “이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선배 없는 정치활동’을 시작하고 윗세대와 단절을 경험했다”고 분석했다.
페미니즘이 정당에서 주요 의제가 되면서 갈등도 생겼다. 당내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이용하거나, 후보자가 젊은 페미니스트 당원들의 공개 지지를 받은 뒤 모습을 바꿔 기존 정파에 합류하는 식으로 개인 입지를 위해 도구화하는 사례도 생겼던 것이다.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일반 당원에게 페미니즘은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페미니즘은 젊은 여성 정치주체들에게 기회와 위기를 함께 던져준 셈이다.
최나현(부산대 사회학과)씨도 “(기존 여성운동조직의) 수직적 구조, 상징 권력을 가진 ‘꼰대스러움’이 젊은 세대에게는 거부감을 준다”고 말했다. ‘지역 청년 여성’을 연구한 그는 이들이 한국 주류 여성운동 흐름에서 소외된 존재였지만 이제는 달라졌다고 했다.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은 서울과 먼 곳에 있더라도 온라인으로 실시간 정보를 흡수하며 지역에서도 채식, 퀴어, 건강·신체·섹슈얼리티, 여성영화, 여성주의 글쓰기 등의 흐름을 동시간대로 주고받는다. 애면글면 ‘대중화 사업’을 하지 않고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대중을 확보한다. “함께할 대중은 이미 온·오프라인에 많이 있다.” 희소한 콘텐츠를 보유한 페미니스트들은 서로가 상대의 ‘충전소’가 된다.
2016년 강남역 사건을 추모하는 움직임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대전의 여성주의 실천과 생존전략을 발표한 공연화(충남대 여성젠더학과)씨는 당시 대전의 여성들이 시청 앞에 추모 포스트잇을 붙였으며, 백래시에 맞선 활동을 벌였다는 점을 짚었다.
“아는 페미니스트가 더 무섭다”
권은채(서울대 인류학과)씨는 ‘페미니즘 도서 열풍’ 가운데 20~30대 여성들이 시작한 독서모임을 참여 관찰하고 심층면담을 진행했다. 자칭 “페미니즘 초보들”인 회원들은 책에서 ‘무기’를 찾아내는 데 열중했다. 특히 이들이 찾으려 한 것은 ‘언어의 논리’와 효과적인 ‘되받아치기 전략’이었다. 페미니즘 도서를 학습서나 실용서로 읽은 셈이다. 현실의 차별적인 언행과 편견에 대항하려는 이런 자구책은 “혐오표현 피해 대상 집단의 자력화”(캐서린 겔버)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모임은 중단되었다. 정치적인 올바름을 유지하려는 공동체가 늘 그렇듯, “상처받고 싶지 않고 상처주고 싶지 않은 조심스러운 언행” 속에 친밀감을 유지했지만 더 깊은 관계는 힘들었던 까닭도 있었다.
이정연(이화여대 여성학과)씨는 페미니스트들이 갑자기 관련된 일을 그만두거나 트위터 계정을 폭파하는 “페미니스트 ‘번아웃’”에 관해 설명했다. 구조적 차별과 폭력도 피로를 더했지만 페미니스트 모임 속의 힘듦도 있었다. 견해가 달라 ‘노선 갈등’에 시달리며 심한 좌절을 겪기도 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트랜스 여성을 혐오한다며 ‘랟펨’이라 일컫고, 여성문제가 아닌 퀴어·빈곤·장애인·동물·난민 의제까지 관심을 갖는다며 ‘쓰까’(섞어)라고 지칭하면서 나뉘었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기어코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게 된 젊은 여성들은 커다란 포부에 견줘 부족한 자원과 환경으로 좌절을 거듭했다. 복합적인 원인으로 생긴 원통함과 억울함 속에 정신과나 심리상담센터를 찾는 것도 ‘강남역 세대’ 여성들의 공통점이다. ‘페미니스트’와 ‘주류적인 삶’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들은 이방인이 돼도 이민이 낫겠다며 떠나기도 하고, 다시금 연대를 꿈꾸기도 한다고 발표자는 덧붙였다.
‘연대’는 나의 생존키트
한 대학의 온라인 강의 중 집단으로 남성들이 수업 링크를 타고 들어와 성기 사진을 올리고 욕설을 남긴 사건, 집게손가락 그래픽과 몸짓을 한 홍보물과 방송인에 대한 비난, 쇼트커트 머리를 한 여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향한 공격, ‘페미니스트 교사’를 색출해야 한다는 집단 민원, ‘페미’ 여부를 검증하겠다는 사이트 등장까지 일련의 사건들은 심각한 파장을 남겼다. 오혜민(이화여대 여성학과)씨는 지난 6년 동안 페미니스트를 향한 이런 ‘체계적 폭력’이 거듭되지만 가볍게 처벌되거나 처벌되지 않고, 나아가 이런 폭력 행위가 계속될 것이라는 사회적 전제 앞에 여성들이 어떻게 자기돌봄에 나서고 있는지 짚었다. 더욱이 ‘반페미니즘’을 주요 공약으로 한 정부가 들어선 뒤 20대 여성의 삶이 더 취약해졌다고 보았다.
2021년 7월부터 31명의 여성 페미니스트와 심층면접을 진행한 이 연구를 보면, 20대 여성들은 원가족이나 친밀한 관계 안에서 “너 페미였어?”라는 질문을 받거나 ‘페미니스트’로 표적이 되어 신상과 개인정보가 모두 노출되는 경험을 겪기도 했다. 비정규직 신분으로 페미니스트 행동을 옹호했다가 직장에서 위협을 느낀 사례도 있었다. ‘페미’를 향한 공격,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 우울·자살충동을 말하는 이들까지 다수였다.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차별까지 개인적 역량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화 속에 좌절감, 무력감, 고립감을 갖게 된 이들의 경험은 이전 세대나 같은 세대의 비-페미니스트들과 다르다.” 이에 20대 페미니스트들은 직장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정체성 숨기기, 호신용품 구비, 경제적 자립, 운동, 사회관계망서비스 줄이기, 공부하기 등으로 생존 전략을 찾았다. 발표자는 “‘랟펨’ ‘쓰까’ 등으로 나뉜 페미니스트들이 서로 공감을 표하기도 했으며 양쪽 모두 취약성을 가진 존재로서 공통점이 있었다. 연구자는 이들의 언어를 다시금 해석해야 한다”고도 촉구했다.
2030세대 여성들이 주축인 ‘불꽃페미액션’(불펨) 회원이자 연구자인 여여는 23명의 회원 단톡방을 분석하며 희망을 찾았다. “여성가족부 폐지는 생존의 문제와 결부되었고, 여성혐오를 확산한 대선 후보의 당선은 혐오세력의 결집, 페미니스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두려움을 낳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씨를 찾아내려 했다. 함께 페미니스트로 살아내기 위해 나의 일상, 나 자신을 잘 돌보는 것에서 연대는 시작된다.”
사회를 맡은 이지은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강렬한 공통적인 기억으로 갖고 있는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 ‘우연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앞으로 함께 살아낼 것’이라는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특히 페미니즘 노선과 관련해 그간의 과잉된 논의가 학술회의 테이블에 올라온 것이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