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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구술증언록 참여 이현정·김익한 교수 <고잔동 일기> 출간
2022/07/08

본 교육연구단의 이현정 교수님이 세월호 구술증언론 <고잔동 일기>를 출간한 후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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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구술증언록 참여 두 교수 <고잔동 일기> 출간

[한겨레신문] [짬] 4·16기억저장소 운영위원 이현정·김익한 교수

 

 

<고잔동 일기>(가능성들 펴냄).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관리하는 비영리기관인 ‘4·16기억저장소’(소장 이지성) 운영위원 이현정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와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최근 함께 낸 책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4월16일부터 약 3년 동안 두 사람이 써내려간 일기를 모았다. 두 저자는 참사 초기부터 261명의 단원고 학생과 교사를 잃은 안산으로 가서 4·16참사와 그 희생자에 대한 기록을 모으는 데 힘을 모았다. 2년 전 완간한 100권 분량의 세월호 구술증언록 <그날을 말한다>는 두 사람이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6년 협업한 결과물이다.

 

이 증언록 발간 책임자였던 이 교수는 지난해부터 안산온마음센터(옛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 자문위원장도 겸하고 있다. 또 ‘의료인류학’ 전공을 살려 <세월호 사건의 인류학>(가제)이라는 책도 집필 중이다. 지금은 세월호 유가족이 주축인 4·16기억저장소를 단원고 근처 고잔동에서 처음 시작했던 김 교수는 참사 이후 오랜 기간 유가족과 밥을 나누거나 노래를 함께 부르며 그 옆을 지켜왔다.

 

“참사 뒤 2~3년은 일주일에 두세 번, 그 뒤에는 2018년까지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안산에 간 것 같아요. 참사 1년 뒤 둘러보니 안산에 남은 교수는 김 교수와 저 둘이더군요. 교수와 지식인 시각에서 (안산)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이현정) “다른 사람들은 알기 힘든 현장의 구체적인 모습을 남기고 싶었죠. 예컨대 ‘아이를 잃어 슬프다’고만 생각하는 그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이 구체적으로 뭔지 영화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럴 때 유가족들 아픔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했죠.”(김익한)

 

지난 8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두 교수에게 왜 사적인 기록, 일기를 책으로 냈느냐고 하자 나온 답이다. 둘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왔단다.

이 말대로 책에는 참사 이후 3년 동안 두 사람이 안산에서 마주한 아픔과 상처 그리고 절망이 고스란히 담겼다. 김 교수는 2015년 9월23일 일기에, 단원고 교실 존치 문제로 열린 학부모총회 자리에 아이가 세상에 없다는 이유로 입장조차 거부된 유가족의 눈물을 보면서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고 분노의 감정을 쏟았다. 이 교수는 2015년 5월27일 일기에서 세월호 유족과 찰흙 공예를 하며 왈칵 눈물이 고였던 순간을 드러냈다. “호성 엄마의 찰흙 초가집에 지붕이 없어요. 이유를 물으니 배 안에 한참 갇혀 있었던 호성이가 늘 탁 트인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지붕을 뚫었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이 교수나 의료진 등 전문가 집단과 진보적인 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느낀 실망감도 담겼다. 이 교수는 2014년 9월20일 일기에서 자신이 안산에서 만난 사회복지사 상당수는 청와대 쪽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며 행동에 나선 유가족 태도를 지지했지만 정신과 전문의 등 의료진은 유가족의 이런 선택을 아이를 잃은 충격의 증상으로만 보려 한다고 썼다.

 

8주기 맞아 ‘고잔동 일기’ 함께 펴내

6주기 때 구술증언록 100권도 협업

 

“진보 지식인·국가의 민낯 확인”

“현장에서 목소리 모으는 게 중요”

 

처음 안산에 갈 때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참사를 정부와 전문가들이 어떻게 다루는지 인류학자로서 관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이 교수에게 어떤 답을 얻었는지 물었다. “전문가들의 경직성이 우선 눈에 띄더군요. 자신들의 지식 체계 안에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그 지식 체계를 넘어 다른 것을 시도하는 창발성이 필요한데 그게 안 보였어요. 의료진은 세월호 유가족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대상으로만 보고, 왜 이들이 치료받기보다 싸우려 하는지 그 이유는 보지 않으려고 했죠. 그걸 알아야 유가족 고통도 줄일 수 있을 텐데요. 다른 하나는 지식인들이 정치 안에만 머문다는 거죠. 일반 시민들보다도 용기 있게 소신을 말하지 못해요. 아마 그들이 가진 게 많아서겠죠. 세월호 참사로 지식인과 학자에 대한 제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어요. 그 전에는 저를 포함해 교수나 지식인 집단이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죠.” 김 교수는 진보 지식인에 대한 불신의 감정이 더 커졌다고 했다. “많은 진보 학자나 활동가들이 ‘안전 사회’나 ‘자주 교육’과 같은 지향을 추상적으로만 말하지 현장에서 유가족과 함께하려고는 하지 않더군요. 유가족을 지도하려는 모습도 보였고요.”

 

둘은 “유가족들이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많이 했지만 진상 규명 등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가 “세상은 아주 장기적인 변동을 빼고는 변하지 않는다. 세월호를 겪으며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토로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픔과 낙담의 시간에서도 혹 얻은 게 있다면 뭐냐고 묻자 김 교수는 “진짜 운동은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며 생활방식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임을 깨달은 점과, 용기 내어 내 이야기를 세상에 할 수 있게 된 점”이라고 답했다. “안산에서 유가족의 삶에 나타난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풀어가려고 실천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김 교수는 그 예를 하나 들었다. “세월호 희생자인 수현군 아버지 박종대씨가 2년 전 세월호 자료를 모아 1100쪽이 넘는 책 <4·16 세월호 사건 기록연구-의혹과 진실>을 냈어요. 수현 아버지가 책을 쓰겠다고 해서 이 교수와 제가 거의 1년 동안 매주 그분 집을 찾아 책쓰기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을 했어요. 마치 박사 논문 지도하듯이요.“

 

이 교수는 참사 이후 영화 <트루먼쇼>를 떠올렸단다. “열심히 살다 우연히 세월호를 만나, 제가 그동안 살았던 곳은 꾸며진 스튜디오에 불과하고 그 바깥에 진짜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충격이었죠.” 그가 말하는 스튜디오 바깥세상이란? “세월호 참사 뒤 국가는 아이를 잃고 힘겨워하는 유가족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고 회유와 협박까지 했어요. 국가의 민낯을 본 거죠.” 덧붙였다. “세월호 이후 국가에 대한 환상이 깨졌어요. 국가가 만약 자본주의 시장 질서에 반한다고 판단하면 국민 안전을 지키는 그 어떤 정책도 절대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죠.”

 

지난 8년의 경험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도 커졌다는 이 교수는 이런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거대 국가에 기대지 말고 작은 단위로 내려와 삼삼오오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해요. 자기 주변의 삶에서 그 영역을 만들어야죠. 또 법과 제도의 논리에만 매몰되지 말고 그 영역 밖의 다른 가능성도 찾아야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