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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익명의 빈틈, 재현이 아닌 변형으로 증식하는 현장들
2022/07/08

 

 

 

본 교육연구단 인류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강원대학교 강사로 재직중인 이길호 박사님이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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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빈틈, 재현이 아닌 변형으로 증식하는 현장들 

 이길호 2022.06.08 09:07

 

천하제일연구자대회 ⑬ 사이버공간의 현지과학을 위하여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사회과학은 언제나 관찰자들의 담론이었고 

관찰되는 것들의 담론을 자신과 동등한 지평에 놓기 어려워했다. 

가상적 관계성이 현실 관계성의 ‘변형 없는 확장’처럼 취급될 때 

기존 범주로 재현되지 않는 익명의 공백이 한편에서 개입해온다. 

그 증식하는 타자성의 현장은 오늘날의 ‘현지과학’을 소환한다.” 

 

 

상황은 달랐을 수도 있다. 십 수 년 전 처음 사이버공간에 관한 인류학 연구를 시도했을 때, 그곳은 익숙한 일상이 낯선 (비)일상들로 분기하고 여럿의 타자가 차이를 유지한 채 접목하는 공간처럼 보였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심각하거나 아니면 가벼운 형태로 조우하게 되는 타자성은 그 가상적 공간을 또한 지극히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했다. 

 

낯선 것이 주는 끔찍함을 넘어 꽤 매력적인 면이 있는 곳이었을 터였다. 물론 당시도 이를 또 하나의 낯익은 일상성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없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주류적 시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현지에서 참여-관찰을 수행하는 에스노그래퍼의 눈에는 그것은 단순히 인터넷-미디어도, 소셜-네트워킹만도 아니었다. 사회적 갈등과 혐오를 그대로 몸체에 투영한 채 진부할 정도로 증폭시키는 복사판도 아니었다. 우리는 일어난 일들과 함께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관찰되는 것들의 사회과학 

 

번역하기가 모호한 구석이 있는 ‘에스노그래피’는,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체가 ‘번역’의 작업에 가깝다. 보통 ‘민족지’나 ‘종족지’, ‘문화기술지’ 등으로 불리지만, 본래 어원적 의미에 조금 과장되게 충실해 보자면 ‘사람(ἔθνος)지’ 정도가 어떨까 싶다.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인류학이 ‘사람(person[s], people)에 관한 담론’이라고 해도 이 질문에 즉답하기는 까다롭다. 인간과 인격, 자아, 정체성의 개념적 차이 또는 유사에서부터, 집단 및 조직화의 재현 범주들, 그리고 사물과 비인간행위자 등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따라오는 물음들이 있고, 급기야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적 구도에 칼을 대는 것으로 끝날(또는 다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장에는, 스트래선(M. Strathern, 『관계들』)의 말마따나 ‘연결’과 ‘관계’의 구체화된 표현으로 그것을 생각한대서 크게 무리는 아닐 듯싶다(언급한 사람의 범주 모두 넓은 의미의 ‘관계’와 관계가 있다). 결국 에스노그래퍼는 어떤 형태의 연결들과 관계들을 관찰하고(또는 참여하며), 그것으로부터 ‘사람’의 형상을 기술한다. 즉, 그 타자성을 ‘번역’한다. 미리 마련된 동일자 형상을 주머니 속에 지닌 채 예비된 행위성을 재현하는 일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어쩌면 결정적 차이다. 레비스트로스(C. Lévi-Strauss, 『구조인류학』)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관찰자의 사회에 초월적 가치를 부여하는 구심적 과학들”과 분리해서 “내재성의 관점을 받아들인 원심적 과학”으로 인류학을 규정했다. “인류학은 관찰되는 것의 사회과학을 창안하고자 한다.” 이 세련된 선언적 정의(“현지과학”)는 실천하기 만만치 않다. 관찰되는 것(‘현지사람’)에 대한 관찰자의 태도나 선의·의지와 별개로, 관찰자가 속한 지식체계의 관습과 규범 등에 먼저 충돌을 일으키는 전회일 수 있는 까닭이다. 

 

사회과학은 언제나 관찰자들의 담론이었고, 관찰자 담론은 관찰되는 것의 역량을 자신의 것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어려워했다. 오랜 기간 그것은 ‘번역’보다는 해석을, 차라리 대변을 필요로 하는 성격에 가까웠을 것이다. 관찰자들이 소통을 부르짖을 때조차 그들의 소통은 관찰되는 것과의 소통과 무관할 때가 많았다. 관찰되는 것을 ‘재료’로, 관찰자들의 장에서 소통 가능한 재현 언어와 인식 범주가 (그와 본질적으로 별개인) 관찰되는 것을 덮어쓴다. 

 

 

선을 3분의 1씩 제거하면서 역산출되는 무수한 “먼지”들. 점이나 선으로 재현되지 않는 숨겨진 차원의 실재를 가시화한다. 증식하는 빈틈에 초점을 돌려보자. 공백은 단지 ‘일어나지 않은’ 부재이기를 그치고, 기존 재현형식을 변형하는 개입으로 형상이 반전된다. 이 분열차원의 이미지는 일상성-속-익명성에 관해 ‘내재성의 관점’을 환기한다. 그림=메릴린 스트래선, 『부분적 연결들』

변형 없는 확장과 소통의 진부함 

 

문제는, 관찰되는 것과의 소통이 관찰자들끼리의 소통과 ‘소통되지 않을’ 때, 그것이 처리되는 방식이다. 관찰자들은 낯선 것을 익숙한 대상으로 만들기 원하지 정작 낯선 것을 원하는 게 아닐 수 있다. 설명과 재현의 공백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타자성은 어떤 형태로든 처리될 필요가 있다. 설령 기존 익숙한 규범적 평가가 그것을 왜곡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사이버공간상의 어느 낯선 집합체는 세대나 젠더, 정치적 성향이나 계층의 ‘객관적’ 지표에 따라 곧바로 분류되고 식별될 것이다. 그에 따라 이들의 행동 양상도 예측 가능한 범주로 예속되는데, 그 식별된 정체성이 상정된 ‘현실사회’ 정체성과 일대일 대응되는 한 사이버공간은 기존 사회의 확장판으로 자리매김하는 속에 있기 때문이다. 

 

‘대상의 변형 없이’ 적용 규모의 확장을 허용하는 것은 산업 생산의 전형적 프로세스다. 어떤 면으로 그 공정은 관찰의 인식구조에 어김없이 끼어든다. 가상공간의 ‘가상성’은 ‘허상’이나 ‘상상’의 단순화된 관념을 넘어 기존 사회적 단위들이 동일성(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그것이 무엇이든 차이화하지 않은 채 이식되는 토양 같아진다. 그러나 칭(A. Tsing, 「확장불가능성에 관해」)의 말마따나 “확장하는 것은 새로운 재료와 관계를 취함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변형 없는 확장성(scalability)이란 사실 ‘자연스럽지’ 않음에도, 왜 관찰자들은 “마치 생물학적 프로세스라도 되는 듯이” 이를 당연하게 간주하기 시작했을까? 

 

가상성을 익숙한 현실성의 향연들로 배치하는 관찰 구도가 ‘일어난 일’이라면, 그에 대한 사후 관찰로 지금 시점에서 이해되는 분기점이 있다.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는 문제 이전에 그것을 ‘낯선’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다. 가상적 관계성은 ‘현실’ 관계성의 변형 없는 확장처럼 취급되고, 또한 그래야지만 구체적으로 정의 가능한 대상이 된다. 이런 담론공간에서, 일어날 일들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시 확인하고 재현하는 지표이자 우리 안의 낯익은 야만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뿐이다. 소셜미디어상의 그 숱한 “관종들”, 조롱과 희화화, 풍자를 빙자한 혐오와 소통이라는 이름의 정치선전, 그리고 이를 준엄하게 꾸짖는(때로는 역으로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관찰자들의 논평이 비사회성 또는 반사회성에 대한 사회비평 차원에서 바로 그 ‘소셜’ 미디어에 등재된다. 

 

관찰자들의 당혹감은 어쩌면, 사이버공간을 사회의 ‘비사회적’ 부분집합으로 규정하는 데 따른 논리적 궁지를 미처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전에 그것이 범죄사회학이나 범죄심리학의 주제로 탈바꿈해버리는 데 있을 것이다. 익명의 가면을 쓴 불법성들로 표상되는 디지털 환경에 대해, 그 밖의 변형성을 간과하거나 누락한 관찰인지 물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숨겨진 연결과 증식하는 현장들 

 

따라서 한편으로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의 후유증이기도 하다. 관찰자들이 관찰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소통’을 계속하고 있을 때, 관찰되는 것들도 관찰자 담론을 반영한 채로 이미 관찰하고 있었다. 그 관찰되는 관찰자는, 디지털 ‘원주민’과 ‘유입민’이 애초에 구별될 수 없는 방식으로 균일한 경관을 구성하는 데 관여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사이버공간이 현실의 동일자에 대해 차이화한 타자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망각하거나 미리 없는 셈 치면서 말이다. 

 

물론 우리 안의 타자를 인정하는 것은 때로 바깥의 타자를 이해하는 것보다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그런 의미의 타자-원주민이 디지털 세계에 관한 지식체계 안에 ‘객관적’ 범주로 구성될 수 있는 대상인지도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또는 다른 가능성들의 폐지에 의해 가능해진 일에 초점을 돌리면, 대상을 객관화하는 것과 별개로 관점의 차이가 현실화하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형상이 소환된다. 관계의 가상성은 변형 없는 확장을 허용하지 않는 형태로, 숨겨진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을 수 있다. 

 

규범화된 외부 관찰로 쉽게 포착되지 않는 공백들. 내재적 관계로의 참여-관찰을 통해서(만) 조우하게 되는 그 ‘사람들’은 체계의 언어(관찰·명명·분류를 통한 추상화)로 직조되는 질서에서 비켜나 익명화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20대(또는 50대)라서 모두 ‘그러하게’(또는 그렇지 않게) 입장 지어지고 마는 존재가 아니다. 인터넷이 추상적 사회범주(또는 갈등)를 구체화하기 위한 자리로 동원될 때, 사회(또는 갈등)의 직접 등기부로만 간주된 인터넷은 또한 그것이 수반했을 불확정성의 다른 주름들을 평평하게 만든다. 하지만 비대면 플랫폼을 통해 전개되는 일련의 “폭로 운동”은 공동체의 사회(학)에 온전히 수렴되지 않는 부분을 남기고, “게임스탑 사태”와 같은 집합적 반(反)공매도 실천은 극대화나 ‘개인 대 기관’의 설명 구도를 초과할 것이다. 

 

이것은 일어난 것의 어느 반대면에서 인류학자의 시선에 가시화되는 역형상(counter-figure), ‘재현’이 아닌 ‘변형’으로서 증식하는 익명적 참여의 현장들이다. 거기서 사이버공간은 단지 관계의 결핍과 그것의 벌충을 도상화하는 공간이기를 그친다. 대신에 기존 범주와 단위들의 축적에 구멍을 내는, 결국 낯선 연결과 관계들의 개입을 조건화하는 장소로 존재할지 모른다. 오늘날 일상성-속-익명성의 분열차원에 관해 새롭게 유효한 것이 될 명제와, 그리고 일어날-수-있었던 현지과학의 정립을 촉성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관찰자들의 전형적 해석을 한켠에 덧붙인 채로, 때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하거나 가벼울지라도. 

 

 

이길호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한국에서 사이버공간의 인류학을 처음 시작했다. 대학원에 들어가 우연히 가상공간의 폭주를 목격하고는 입학 당시 제출했던 연구계획과 다른 경로에 진입하게 된다. 가상적 공간성이 또 하나의 현실적 장소성을 띠면서 ‘현실공간’과도 차이화하는 양상에 주목, 미디어-대상이 아닌 인류학적 현장으로 인터넷에 접근했으며, 그곳의 에토스와 인지구조, 분열체계에 관해 참여-관찰했다. 장소론과 교환론에 바탕을 둔 작업을 이어오다 다시 “어나니머스”라는 낯선 현상에 조우한다. 익명 플랫폼을 경유해 현실체계에 개입하는 운동들로 초점을 돌리면서, 비재현적 변형으로서 익명-되기의 존재론 및 타자-되기로서의 익명성 실천이 제기하는 정치-인식론적 질문들(“익명의 조건”)을 주제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존 사회론이 자기 설명체계로 포섭하지 못하는 공백이 증폭하는 지금, 익명론의 정립을 통해 차이적으로 산출되는 명제들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 「유(類)적 익명」, 「익명적 저항의 경로들」, 「익명적 교환」, 「익명의 가장자리에서」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사이버공간에 관한 첫 에스노그래피 『우리는 디씨』를 비롯해, 공저로 『속물과 잉여』, 『불순한 테크놀로지』 등이 있다.

 

이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