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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여자력’과 ‘성공페미’?···그 끝엔 여전히 ‘유리 낭떠러지’
2023.03.25 08:00 입력
이영경 기자
오늘을 넘는 아시아 여성
지은숙 외 지음|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324쪽|2만9000원
[책과 삶]‘여자력’과 ‘성공페미’?···그 끝엔 여전히 ‘유리 낭떠러지’
여성 인류학자들이 쓴 아시아 여성들의 삶
능력만 있다면 불평등 해소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희생·헌신 강요
기를 쓰고 능력 키워도 끝은 여전히 ‘유리 낭떠러지’ ‘시멘트 천장’
일본에는 ‘여자력(女子力·조시료쿠)’이라는 말이 있다. 우먼파워(woman power)와 같은 여성의 역량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본에서 통용되는 ‘여자력’의 의미는 결이 좀 다르다.
“여자력을 연마하여 높이면, 남성에게 호의를 얻어 인기녀가 되고… 여자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즐기면서 인생을 잘 살아나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2000년 무렵 등장한 신조어인 ‘여자력’은 남성중심적이고 경쟁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의 생존 전략으로 채택됐다. 거품경제 붕괴 후 ‘○○力’과 같은 말이 유행했는데, 여자력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이라는 것은 마이너스지만, 여성적이라고 간주되는 특성을 살아가는 힘으로 전환하자는 발상”이었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저성장과 고용불안 속에서 살아남을 수단이 개인의 능력밖에 없다는 현실인식이 자리한다.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향상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와 결합해 탄생한 ‘새로운 여성상’이었다.
일본에 여자력이 있다면, 한국엔 ‘성공페미’가 있다. 여성 또한 모든 기회와 수단을 동원해 성공하고 물질적 부도 이뤄야 한다는 믿음이 한국 페미니즘 담론 내에서도 등장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로 불안정한 고용시장 속에서 개인의 역량만 있다면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도 여성들이 능력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여자력과 성공페미를 구성하는 내용은 다르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일본과 한국의 여성들이 ‘개인 능력 극대화’를 생존 전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지은숙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교수,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오은정 서울대 인류학과 BK부교수,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등 여성 인류학자 11명이 집필한 <오늘을 넘는 아시아 여성-페미니즘이 묻고 인류학이 답하다>는 아시아 각국 여성들의 삶을 패치워크로 엮는 작업이다. 일본의 여자력과 한국의 성공페미가 교차하고, 한국에서 ‘양성평등’을 위해 여성도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가운데 양성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이스라엘에서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배제를 살핀다. 영화 <미나리>로 배우 윤여정이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K할머니’를 치켜세우는 이면에 자리한 할머니의 ‘그림자 돌봄’을 말한다. 한국에서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이 검토되는 가운데 말레이시아와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여성 가사노동자들이 실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논한다. 뉴스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아시아 여성들의 다양한 삶이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구조라는 맥락에서 만날 때, 오늘날 ‘아시아 여성의 삶’이라는 커다란 그림이 그려지며, 각자는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 정확히 그려볼 수 있다.
2000년 일본 보수화와 함께 등장한 ‘여자력’
여성다움을 활용해 성공하자는 ‘신자유주의 능력주의’
젠더차별적 구조엔 침묵···남성과 같은 능력에 여자다움까지 요구
지은숙은 ‘여자력과 일본의 페미니즘’에서 200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여자력 개념을 통해 일본 여성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과 젠더 담론의 변화를 진단한다. 일본에서 여자력은 처음엔 화장, 패션 등 소비와 마케팅 측면에서 사용됐으나 그 의미가 확장돼 ‘여자력 높은 남자’도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여자력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성을 계량화, 수치화한다는 점이다. 배려·요리·세련됨 등이 여자력을 구성한다. “여자력은 본인이 자발적으로 노력해서 몸에 익히고, 그 등급을 올려야 하는 새로운 가치 평가 시스템”이 됐으며 “‘능력’ ‘경쟁’과 같은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 확산한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2000년대 일본 보수화와 함께 ‘페미니즘은 끝났다’는 백래시의 흐름 속에서 여자력이 부상했다. 여자력은 여성의 사회적 활동 폭을 넓혀주는 ‘새로운 여성성’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기존의 성별이분법적 고정관념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성의 상품화를 촉진하는 문제점도 있었다. 구조적 젠더차별엔 침묵하는 여자력에 대한 칭송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2015년 광고기업 덴쓰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쓰리가 과로로 자살한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다카하시는 한 달 평균 130시간 이상 잔업을 하고 하루 평균 2시간의 수면을 취하면서 과로했지만 남자 상사들에게 “부스스한 머리, 충혈된 눈으로 출근하지 말라”거나 “여자력이 낮다”는 지적을 들었다. 이로써 “대기업 엘리트 사원조차 여자력을 빌미로 직장 내 괴롭힘을 받아야 한다면 여자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여자력은 누구에게 무기인가”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여자력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능력에 더해 여자력이라는 감성·외모·태도를 기를 것을 요구하면서, 일본 사회 모순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젠더차별적 구조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30~50대 전문직 여성들, 능력만 있으면 성공 믿지만
여성 능력 ‘유통기한’은 40세···유리천장 넘어도 유리 낭떠러지
김현미는 ‘능력주의의 배신과 젠더화된 불안’에서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전문직에 대거 진출한 한국의 30~50대 여성들이 겪는 일터에서의 젠더차별에 대해 논한다. 능력주의와 자기계발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재능·학력·전문성을 입증한 사람에겐 무한한 기회가 열려 있다며, 여성도 예외는 아니라는 신화를 설파했다. ‘성공페미’는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자신을 차별의 피해자로 위치시키기보단 능력으로 불평등을 초월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 나타났다. 실제로 고학력 여성들은 전문직에 대거 진출하며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여성의 능력’엔 남성과 달리 유통기한이 있었다. “여성 경력 단절의 이유는 나이다. 40세, 기껏해야 40대 중반까지라는 커리어 시한이 존재한다.”
김현미는 여성들이 젠더차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고 직장 밖으로 내몰리는 것을 ‘유리천장’과 ‘유리 낭떠러지’를 통해 이야기한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던 여성도 40세가 넘으면 ‘능력의 유통기한’이 지난 것으로 여겨져 자·타의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남성 표준 노동자가 일터의 규범과 보상 체계의 기준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여성 고위직에겐 유리 낭떠러지가 기다린다. 유리 낭떠러지는 기업이나 조직에서 성과가 좋지 않을 때, 부패한 남성 리더십의 재편, 조직의 갱신과 변화 필요가 있을 때 여성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현상을 말한다. 악조건하에서 고용된 여성들은 쉽게 해고되어 밀려나기 쉽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에서 유색인종 여성 최초의 학과장 김지윤은 영문과의 난제들을 해결할 것을 요구받다가 불신임을 받아 물러난다. 반면 남성은 여초 조직에서 더 빨리, 쉽게 승진하는 ‘유리 에스컬레이터’를 타기도 한다.
양성 의무복무제 이스라엘 여군이 부딪치는 ‘시멘트 천장’
대부분 보조적 업무하며 ‘이등군인’으로 여겨져
“싸우지 않기 위한 권리”를 위한 병역거부도 늘어나
임안나 강원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군대의 꽃’과 ‘여전사’의 표상을 넘어”에서 이스라엘 여성의 군 복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스라엘은 1949년 세계 최초 양성 의무복무제도를 도입했다. 한국에선 이스라엘을 예로 들며 “양성평등을 위해 여성도 의무복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스라엘의 여군이 처한 현실은 평등과 거리가 있다.
이스라엘 여군이 부딪히는 것은 ‘시멘트 천장’이다. 대부분 보조적 행정 업무를 수행하며 ‘이등 군인’으로 여겨진다. 영화 <제로 모티베이션>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여군들은 행정반 소속으로 무료한 군대 생활을 견뎌내며 스스로를 “쓰레기 담당 부사관” “우편 담당 부사관”으로 부르거나 남성 간부 회의를 위한 커피를 준비하며 여군의 현실적 위치를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여군 역사의 전환점은 1994년 엘리스 밀러가 이스라엘 공군을 상대로 낸 소송이다. 공군 파일럿에 지원한 밀러는 여성이란 이유로 거부당하자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밀러의 손을 들어줬다. 2000년에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임무에 제한 없이 복무할 권리를 명시하면서 군 조직에서 젠더평등이 주요한 이슈로 부상했다. 이스라엘에서 전투부대나 파일럿 복무 경력은 제대 후 사회적 상향 이동의 통로이자, 민간항공사 취업을 위한 실질적 조건으로 “군대 내 젠더평등을 넘어 사회에서의 평등권과 기회균등 측면의 문제가 된다”. 제도 개선에도 불구하고 종교 문제와 결부돼 여군은 복장 검열, 성별 분리 등의 차별과 지속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반군사주의 페미니즘’이 등장했다. 2006년 19세의 이단 하릴리는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위계적이고 남성적인 구조, 강요된 젠더 역할, 군대 내 성폭력, 군대와 가정폭력의 유사성’ 등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싸우지 않기 위한 권리’를 위해 병역을 거부한 하릴리는 2주간 수감 후 결국 ‘병역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페미니즘’이 부적합 판정의 이유가 됐다. 임안나는 “전통적 젠더 관념과 차별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피상적 양성징병제 도입만으로 양성평등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군대가 기존의 젠더 질서를 재생산하는 장으로 기능한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된다”고 말한다.
k-할머니의 그림자돌봄, 이주 가사노동자의 착취···‘돌봄의 위기’
이란 여성의 #카메라는나의무기, 한국 성소수자 엄마 활동가···저항과 실천
김희경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조교수는 영화 <미나리>를 화두로 조부모, 특히 ‘할마’(할머니 엄마)에게 돌봄을 전가하는 한국 현실을 ‘그림자 돌봄’으로 설명한다. 계급 유지·상승을 위한 경쟁적 가족주의 속에서 할마들은 자녀의 빈자리를 빈틈없이 채우도록 희생과 헌신을 요구받는다고 말한다.
최서연 서울대 아시아문명학부 강사와 김민정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이주 가사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며 구조적 문제 속에서 학대와 착취가 있음을 지적한다. 동시에 이주 가사노동자들이 본국에 자식을 두고 타국에서 ‘남의 자식’을 돌보면서 국가와 가족의 경계를 넘으며 가족의 정상성에 균열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억압적 현실 속에서 싸우며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는 아시아 여성들의 활약도 다룬다. 구기연은 이란 여성들의 ‘#카메라는나의무기’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억압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며 연대하는 ‘사이버 페미니즘’ 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히잡을 도구로 여성의 몸과 사적 영역을 통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문화에 맞서 이란 여성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을 통해 일상적 저항을 공유하고 서로 연결된다.
조수미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부교수는 한국의 성소수자 엄마들이 자녀의 커밍아웃 이후 ‘전통적 모성’에서 벗어나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로 변화하며 정체성을 확장해가는 과정을 다룬다. 오은정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지역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펼친 활동에 주목하며 재난 지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벌이는 생활정치와 연대를 다룬다.
여성 인류학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섬세하게 살핀 아시아 여성들의 삶은 각자 다른 사회와 문화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아시아’와 ‘여성’이라는 맥락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만나고 연결된다. 여성과 인류학의 만남이 새롭게 열여준 시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