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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픔’도 들여다보는 의료인류학
2021/11/01

경향신문

의학·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픔’도 들여다보는 의료인류학을 아시나요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이현정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왼쪽)와 강지연 서울대 인류학과 BK교육연구단 연수연구원이 지난 17일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이현정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왼쪽)와 강지연 서울대 인류학과 BK교육연구단 연수연구원이 지난 17일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1년 넘게 실내에 갇히다시피한 상태로 육아를 하다가 우울증에 걸린 부모가 있다. 병원에 가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는 것만으로 이 사람에게 적절한 치료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아픔은 의학적 방법으로만 치료할 수 없다. 사회구조적, 문화적 맥락을 함께 살펴야 이해되는 아픔이 있다. 

의료인류학은 한 사회의 고통·질병·의료체계에 대해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연구하고, 사유하는 학문이다. 과학이나 의학의 틀 안에서는 규정짓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아픔도 의료인류학에서는 아픔으로 이해하고 다룬다. 최근 출간된 의료인류학 책 <아프면 보이는 것들>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 부모들, 난임·산후풍으로 인해 고통을 겪은 이들, HIV·성매개 감염으로 차별적 시선을 겪은 이들의 아픔을 주제로 다뤘다. ‘한국 사회의 아픔에 관한 인류학 보고서’라는 부제의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함께 참여해 만든 의료인류학연구회 소속 학자 13명이 함께 썼다. 책에서 못 다룬 의료인류학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해 저자들 중 이현정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와 강지연 서울대 인류학과 BK교육연구단 연수연구원을 지난 17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연구회는 국내에 의료인류학 전공자가 많지 않던 2014년에 만들어졌다. 이현정 교수와 김태우 경희대 한의대 교수, 백영경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가 초기 멤버다. 처음에는 공부를 하기 위한 소규모 세미나로 시작했고, 현재는 37명의 회원이 참여하고 있다. 인류학·사회학·여성학·간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의사·활동가들이 모였다. 한 달에 한 번인 모임은 약 8년 동안 거의 빼놓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의료인류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우리의 일상에 많이 녹아 있는, 실천적인 주제를 다룬다”며 함께 공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분야 특성상 학자들도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세상에 참여하고 개입해 좋은 방향으로 바꿔 나갈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각자 학술논문이나 학술서적만 낸다면 어떻게 세상에 개입하고, 변화시킬 수 있겠나요. 같이 고민하고, 때로는 공부한 것들을 함께 책으로 내면서 세상과 소통하려 하고 있습니다.” 

책은 일상에서 한 번쯤은 고민할 법한 사회적 아픔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린다. 돌봄노동, 연명의료(죽음), ‘손상된 몸’이나 장애로 인한 차별 등은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거칠 만한 주제다. 인류학 연구자들은 짧게는 8~9개월, 길게는 7~10년까지 한 현장에 살다시피하면서 이 같은 주제들을 깊게 들여다본다. 강 연구원은 죽음의 의료화와 연명의료결정법 등을 주제로 한 박사논문의 현지조사를 위해 2016년 8월부터 2년 동안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지냈다. 의료시스템이 근대화되면서 죽음의 장소가 집에서 병원으로 이동한 ‘죽음의 의료화’가 이뤄졌고, 이로 인해 연명의료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가 법적 쟁점이 됐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생겨 법적 분쟁의 소지는 줄었으나, 법만으로는 규명되지 않는 죽음을 둘러싼 고민 지점을 짚는다. 

“연명의료결정법이 도입되면서 연명의료를 어느 시점까지 해야 하는지를 두고 가족이나 의료진이 겪던 갈등은 확실히 줄었죠. 하지만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지, 좋은 죽음을 가능케 하는 적절한 장소에서 죽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연명의료결정법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연명의료결정법은 법적 기준인 것이고, 죽음에 있어 순수한 ‘자기결정’이 정말 가능한지도 더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고요.” 

의학·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픔’도 들여다보는 의료인류학을 아시나요

이 교수는 현재 진행형인 한국 사회의 아픔인 세월호 참사를 수년간 보고, 기록해왔다. 그가 이끄는 4·16기억저장소의 구술증언팀은 2015년 6월부터 4년간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만나, 이를 구술증언록 <그날을 말하다>에 담기도 했다. 이번 책에서 그는 세월호 참사 직후 지방자치단체와 의료계가 세월호 유가족·피해자들의 정신건강 지원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환자’로만 대해, 유가족·피해자가 겪는 사회적 고통은 외면한 점을 짚었다. 

“전쟁이나 극심한 빈곤 속에서 혼자서 아이 여러 명을 키우다가 심한 편두통을 겪던 엄마가 병원에 갔다고 생각해봅시다. 병원에서 아무런 병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면, 그 사람은 아픔이 없는 것인가요? 아픔은 전쟁이라는 정치적 맥락에도, 빈곤이라는 구조적 폭력 속에도 존재하죠. 병원의 검진기계를 통한 진단을 넘어서서, 그 사람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아픔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책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겪는 사람들의 아픔도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함께 살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해 돌봄이 여성에게 쏠리는 젠더 편향이 더 심해졌는데도, 사회적으로 여성의 돌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코로나19라는 재난으로 사망하는 이들이 연일 발생하면서 죽음의 무게가 사회적으로 더 가벼워지고 무덤덤해진 분위기가 있다”며 “이런 문제들에 대해 사회적으로 더 많이 논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강 연구원은 코로나19 확진자 연구를 하면서 관찰한 사례를 전했다. 한 가족이 확진 판정을 받은 후 자가격리를 하는 기간에 엄마는 아이 돌봄과 집안일, 코로나19로 삼중고를 겪었으나, 아빠는 격리의 답답함만을 토로했다는 일화다. 강 연구원은 “확진자 몇명, 사망자 몇명으로 수치화되고 시각화되는 것에는 연연하면서 정작 확진 판정을 받거나 자가격리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없다”며 “설정된 목표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돌봄, 빈곤, 가정폭력 등의 문제가 그 심각성에 비해 잘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