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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내용
[남도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_풀언덕을 나는 닭
2020/03/06

남도일보에 '남도인문학'-풀언덕을 나는 닭을 기고한 이윤선 씨가 본 학과의 이선화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 '초원을 나는 닭'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쓴 글입니다. 중간에 논문 소개도 나옵니다.

 

https://jnilbo.com/2020/03/04/2020030414193622932/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풀언덕을 나는 닭

 

등록 : 2020년 3월 4일 오후 3:05 / 수정 : 2020년 3월 4일 오후 3:05

 

한 무리의 닭들이 마당으로 내달렸다. 풀밭이며 고랑이며 저희들 마음대로 내닫는 닭들, 풀밭이 얼마나 자유로웠으면 쥔장이 뿌려 둔 봄동 배추도 곁눈질이다. 몇 마리는 낮은 구릉으로 날아오르는 이른바 방사(放飼) 목장.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이다 싶었는데, 이내 생각이 났다. 마당 감나무로 뽀르르 날아오르던 우리 집 닭들. 아버지는 그때마다 “저런, 저런!” 지천을 늘어놓으셨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해서 그러셨겠지. 날아오르는 닭에 투사시킨 아버지의 마음은 빈계지신(牝鷄之晨), 본래는 암탉이 울어 새벽을 알린다는 뜻이다. 한 고사가 전한다. 중국 은나라 주왕(紂王)이 절세미녀 ‘달기’에게 넋을 빼앗겨 먹고 마시기를 거듭했다. 그뿐인가 가혹한 형벌을 일삼다가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패하였다.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은나라가 망하고 병사들에게 주왕의 죄상을 고하는데, 달기의 치마폭에 쌓여 국정을 망쳤던 일들을 하나하나 밝히게 되었다. 이후 이 고사(故事)는 여자가 남편을 업신여겨 집안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한다는 뜻으로 전이되었다. 항용 여성의 활발한 활동을 시기 질투할 때 인용하곤 한다. 다시 방사목장의 풍경, 내가 들른 곳은 해남읍 경계의 서승완씨네 닭농장, 요모조모 배경과 환경들을 묻고 비전과 구상을 인터뷰했다. 지금 국내에서 닭을 방사하는 목장은 그리 많지 않다. 익히 짐작하듯이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 닭뿐이겠는가. 농수축산, 임업과 수산까지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 크다. 다행인 것은 아직 절반 방목의 형태지만 곧 농장을 이전하고 완전 방목에 도전할 것이라 한다. 완전 방목과 밀집 사육은 어찌 다를까. 다산이 강진에 유배와 있을 때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 마침 양계를 언급해둔 것이 있다.

해남의 방사(放飼) 목장에서 떠올린 계경(鷄經), 다산의 편지

“네가 양계(養鷄)를 한다고 들었는데 양계야말로 진실로 좋은 농사다. 그러나 양계에도 품위가 있다. 저속하며 깨끗하고 불결한 차이가 있다. 참으로 ‘농서(農書)’를 완벽하게 읽어 가장 좋은 양계법을 골라 시험해 봐라. 더러는 색깔과 종류로 구별해보기도 하고 홰를 다르게 만들어 닭을 기르며 다른 집의 닭보다 살찌고 알을 잘 낳을 수 있도록 길러야 한다. 또 때로는 정경을 시로 지어보면서 짐승들의 실태를 파악해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독서를 한 사람의 양계다. 만약 이(利)만 보고 의(義)를 보지 못하면 서너 집 사는 산골의 못난 사람들이 하는 양계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미 닭을 기르고 있으니 아무쪼록 앞으로 많은 책 중에서 닭 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내어 차례로 정리해라. ‘계경(鷄經)’같은 책을 하나 만든다면 육우라는 사람의 ‘다경(茶經)’, 혜풍 유득공의 ‘연경(煙經)’과 같은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속사에 종사하면서도 선비의 깨끗한 취미를 갖고 지내려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다산연구원장 박석무는, 말을 해도 닭을 길러도 이익과 의를 함께 생각하고 우아함과 품격을 높여야만 비난과 질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절제를 못하고 하고 싶고 내키는 대로 떠벌려 세상을 시끄럽게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선비로서의 태도, 자기경영의 철학을 전해주고자 보냈던 100여 통 편지 중 하나다. 논쟁은 미뤄두더라도 그로부터 200여년이 흐른 지금 우리의 닭 키우기, 여기에 어떤 품위가 있는지 정도는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아빠가 퇴근할 땐 양념통닭!

우리네 서민들의 자명한 하루 서사. 아빠가 퇴근한다. 보금자리는 익명성을 상당부분 보장해 주는 아파트다. 옆집과 만나도 일부러 아는 체 하지 않는다. 엄마 또한 이런저런 가사와 일상 때문에 지쳐있다. 비로소 아이들이 학교에서 학원을 돌아 귀가한다. 괜히 미안한 아빠가 묻는다. 어이쿠! 아들, 딸 수고했다. 뭘 먹고 싶어? 피곤에 찌든 아이들이 건성으로 대답한다. 양념통닭!! 오, 그렇지. 주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딩동! 매콤한 통닭이 먹음직스럽게 도착한다. 배를 채우니 머리가 멍하고 아팠던 통증들이 사라지는 듯하다. 매운 맛이 분비시키는 엔도르핀이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저녁 일찍 퇴근이라도 한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TV에서 먹방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요리나 배식, 식사의 과정, 때때로 멋진 배경과 아름다운 배우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포만감으로 행복하다. 아빠 엄마도 덩달아 맥주 한 캔, 미처 소화를 시키지 못한 채 잠에 든다. 하지만 이 일상의 좌표에 은닉된 것들이 너무 많다. 이 고기들이 어디서 왔는지, 열악한 동물 농장의 처우는 어떠한지, 반복 주입되는 포만감의 출처가 어디인지 철저하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신승철은 그의 연구 「탄소무의식과 분열분석-가타리의 분열 분석적 메타모델화를 중심으로」에서 이를 에너지의 독점적 사용과 공간적인 단절 및 분리로 해석한다. 탄소 중독적 삶을 망각하게 하는 시스템이라는 것. 즉, 탄소무의식이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환경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주 매끄럽게 달려가는 자동차, 빛깔 좋은 고기, 환한 불이 켜져 있는 아파트, 일회용으로 가득 찬 상품들, 이러한 이미지-영상들이 탄소무의식을 생산하며 소비하게끔 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뜻이다. TV와 같은 매스미디어가 권장하는 육식문화는 농장동물의 열악하고 절박한 생애를 보여주지 않는 가상현실로서의 맛깔나고 먹음직한 모습으로만 드러난다. 대체 그렇게 맛있고 먹음직스럽게 우리 식단으로 공급되는 농장동물의 현실이 어떻다는 것인가. 팁에서 간단하게 그 일면을 고발해둔다.

초원을 나는 닭, 네이멍구(內蒙古) 바인후수 마을에 길을 물어

중국발 코로나19가 우리나라는 물론 지구별을 휩쓰는 상황을 맞이하고 보니 불현듯 네이멍구 바인후수 마을이 떠오른다. 이선화의 2015년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학위논문 ‘초원을 나는 닭(草原飛鷄): 중국 내몽고 초원 사막화 방지의 생태정치’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초원에 닭을 방목하여 사막화를 막고 소에서 닭으로 몽골족의 생활양식 변화까지 시도한 프로젝트를 분석한 글이다. 세세한 내용을 여기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내몽골 사막이 우리네 황사의 한 원인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할 수 있었다. 이선화가 주장하는 것은 과학자와 목축민, 구체적으로는 초원을 나는 닭 프로젝트의 생태학자와 닭 방목에 참여하는 서기 간의 갈등과 타협의 과정을 통해 추출한 ‘생태모델’이었다. 그들 이해관계의 충돌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묵인하기와 감수하기 등을 통해 서로 협상하고 타협을 이끌어 내었고 마침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 골자다. 닭은 초원의 식생을 덜 파괴하면서도 배설물을 통해 초지에서 얻을 수 없는 양분을 초원에 공급하게 된다. 초원방목은 옴짝달싹 못하는 양계장의 닭과 달리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서 건강한 몸을 가지고 유기농 마크를 달게 되어 도시민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닭은 사막에서 살아남고 원주민 몽골족들은 경제적 이득을 얻으며, 도시의 소비자들은 윤리적 소비를 하고 생태학자들은 연구 및 정부 제안서까지 써내는 선순환이 일어나게 된 것. 이들은 닭을 따라와서 세계를 발견했고 새로운 생태계가 출현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기까지 영감을 주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논문이기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다시 해남으로 돌아가 풀밭이며 고랑이며 산비탈을 내달리는 닭들을 바라본다. 나는 이들에 대해 ‘풀언덕을 나는 닭’이라 명명해드렸다. 내 유년 감나무에 오르던 닭처럼 놔기르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산이 말했던 양계의 품격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광우병이나 신종플루, AI, 지금 전 세계를 휩쓰는 코로나19에 대한 성찰의 주문과 함께 말이다. 네이멍구의 ‘초원을 나는 닭’은 비대칭적이고 탄소무의식적인 육식의 욕망과 현지 주민들의 목축생계를 조화시킨 협상의 산물이요 생태적 창조물이었다. 우리네 국토에서야 감히 사막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만, 풀밭과 언덕과 작은 구릉을 초원에 비교할 수 있다면, 현행 사육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목축업자들까지를 고려한 새로운 메커니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신승철은 말한다. 현존 문명의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도마에 올라가지 않는 한 생태적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정상적인 삶이라고 당연시되던 일상이 바로 탄소중독적인 무의식의 배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염세적이고 종말론적인 사이비 종교로의 도주와 일탈의 이면에도 이런 일상적인 무관념과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빈계지신(牝鷄之晨), 마침내 암탉을 풀언덕으로 날리고 크게 울게 해야 생태적인 아침이 밝아올 모양이다. 풀밭을 나는 닭,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메커니즘의 터무니없음과 조장(助長)에 대해, 그 부조리한 이면과 은닉된 음모들에 대해 주목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한 때다.

남도인문학팁

다단 케이지(cage)사육, 탄소무의식을 강화하는 매커니즘

그렇게 맛있게 먹던 닭이 공장의 상품처럼 찍혀 나오는 현장을 확인하게 되면, 십중팔구 고기를 먹지 못한다. 고상식(高床式) 축사 등 밀집된 공장식 축사에서 눈만 멀뚱멀뚱한 닭, 돼지, 오리 등 동물들을 보고나서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키워드만 두드리면 근자에 수도 없이 고발된 기사들이 쏟아진다.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 왈, 우리나라 육계 출하 평균체중은 1.5kg이다. 왜일까? 사육환경과 사육기간 때문이다. 닭장은 좌우로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밀집된 공장처럼 설계되었고, 낮과 밤 없이 전등이 밝혀지고(artificial light) 부리는 잘린다(debeaking). 흙 목욕을 하지 않으면 진드기를 떼어낼 수 없기에, 항생제를 쓰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환경이다. 다산 정약용이 말한 품격은커녕 오로지 생산성 하나만을 목표삼고 있는 양계방식이다. 소와 돼지를 포함한 육식동물 농장이 모두 마찬가지다. 예컨대 멀쩡하던 닭이 자빠져 죽는 ‘빨딱병’, 즉 SDS(sudden death syndrome)가 빈번한 것도 닭의 동맥경화, 관절염, 뇌졸중 등이 원인이라 한다. 여러 전문가들은 이를 구제역 사태의 원인으로 본다. 공장식 밀집 사육, 성장호르몬 과다 투여, 품종개량에 의한 유전자 다양성 소실, 항생제 오남용 등이 불러 온 것이 광우병, 에이즈, 신종플루, 조류독감(AI) 등이란 것. 우희종에 의하면, 지난 30년 동안 발견된 새로운 인간 질병 중 75% 정도가 야생동물이나 가축에게서 유래했다고 한다. 제 2의 인수(人獸, 동물과 사람)공통전염병이 인간을 공격했다는 것 아닌가.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코로나19도 야생동물로부터 전이된 것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지난 통계들을 보면 AI로 살처분 되어 땅 속에 묻힌 돼지, 닭, 오리 등이 상상을 초월한다. 육고기 소비의 문제 정도가 아니라 동물 복지, 생태적이고 순환적인 삶으로의 근원적 전환이 아니면 인류가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방역권 건강권을 포함한 생존의 문제, 생태환경은 물론 국가의 존재 자체가 휘둘리는 상황을 맞이한 우리 처지가 심히 곤혹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