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포털 사이트 ‘야후!(Yahoo!)’는 인터넷 유저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디지털 유산’을 구축하기 위해 ‘야후! 타임캡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야후! 타임캡슐은 2006년 10월 10일부터 11월 8일까지 각종 글과 그림, 영상 등을 수집했으며, 그중 총 170,857건의 기록을 캡슐에 봉인했다. 이는 타임캡슐 중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디지털 미디어 모음집이라는 평을 받았다. 땅속에 소중한 물건을 묻어두던 과거의 타임캡슐과 달리 오늘날 사람들의 문화를 기록하는 자료는 디지털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SNS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고, 인터넷에서 식자재를 주문하는 일상에서 볼 수 있듯, 어느새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본 기사에서는 인류와 디지털 기술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디지털 인류학(Digital Anthropology)의 현주소를 짚어보고자 한다.
기술이 들려주는 인류의 문화
인류의 문화 및 역사를 연구하는 인류학(Anthropology)은 부족사회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19세기에 시작된 학문이다. 오늘날 인류학자들은 여러 사회 집단이 갖는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 주력한다. 특히 세계화에 따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사회 집단의 형태 및 타 문화와의 소통이 관심사로 떠오르자, 많은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인터넷과 사이버 공간에 대한 인류학 연구가 파생되었다. 인류학의 한 분야로 인간과 디지털 기술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디지털 인류학은 비교적 최근에 신설된 분야이기 때문에 ‘기술 인류학’, ‘사이버 인류학’ 등 다양하게 지칭되기도 한다.
디지털 인류학은 온라인 문화와 오프라인 문화가 상호 간에 주고받는 영향에 집중한다. 연구자들은 사용자들이 인터넷 또는 소셜미디어에서 보이는 소통 습관을 비교하고,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익명성을 이용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이와 같은 연구는 인터넷이 오프라인에서 소통이 제한되었거나 주류 문화에서 소외된 소수자 집단에 다양한 정체성을 통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2010년 12월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시위는 사이버 공간과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새로운 방식의 민주화 및 시민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했다.
디지털 매체에 현재를 저장하다
인류학은 현장 연구를 통해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연구 방법이라는 점에서 실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여느 인류학 분야와 같이, 디지털 인류학을 연구하는 대다수의 학자도 현장 연구를 진행한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를 연구하는 경우, 해당 단체 활동에 참여해 모임의 특성을 관찰하고 면담을 통해 자료를 얻는다. 이와 같은 현장 연구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역사 및 문화를 정성적, 정량적으로 조사한 민족지(Ethnography)의 수집을 목적으로 한다.
심재석의 <현대 민속지 유형 변화에 대한 영상 민속학적 연구>에 따르면 1980년 이전까지 종이 매체를 기반으로 한 민족지를 중심으로 인류학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1990년대 무렵부터 사진 매체 기반의 민족지까지 범위가 확장되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민족지의 디지털 아카이빙이 주목되었고,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사이버 공간에 구현하는 디지털 민족지가 새로운 형태의 민족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디지털 민족지는 컴퓨터 중재 통신 또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방법으로 수집된 자료를 이른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이문웅 명예교수는 영상 형태의 디지털 민족지를 구축하고 보존해 온 인류학자로, 1980년대 후반 이후 필요한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 편집하는 영상 인류학적 방식을 통해 인류학 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가 개설해 2006년까지 직접 맡아 온 ‘영상 인류학’ 강의는 수강생들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주제로 영상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때 제작된 다큐멘터리는 모두 이 교수가 2001년에 구축한 영상 아카이브에 업로드된다. 이 교수는 “이제 인터넷이 연결되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서나 생생한 영상을 바로 열어볼 수 있게 되었다”며 “어느덧 180편을 넘긴 이 작품들이 하나의 거대한 현대사”라고 강조했다.
오프라인 연구, 배제할 수 있나
한편, 디지털 인류학의 연구 방법을 두고 온라인 활동만으로도 연구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이들과 반드시 오프라인 연구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간의 논란이 있다.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인터넷 기반의 가상 세계에서 3년간 연구를 진행한 인류학자 톰 보엘스토프는 “대상이 속한 세계의 방식에 맞추어 연구해야 한다”라고 언급하며 전자의 입장을 지지했다. 반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인류학과 교수 다니엘 밀러는 민족지 연구 시 인터넷 밖에서의 대상 연구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논점은 연구 대상의 범위를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의 모습만으로 한정하는지, 대상의 주체가 오프라인에서 생활하는 모습도 포함하는지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이 쟁점에 대해선 현재까지도 활발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디지털 인류학: 윤리적인 논의
디지털 인류학의 연구 다수가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의 관찰 결과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만큼, 연구에 필요한 자료도 온라인에 게시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의 소통 과정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에 접속한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으며, 수년간 다시 열람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때 온라인 내에서의 소통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관찰한 대화의 기록을 수집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연구 방법인지 논란이 되었다. 미국인류학협회(American Anthropology Association)가 정리한 인류학 연구 윤리 지침에 따르면 연구자는 연구 대상에게 자신이 연구되고 있음을 확실히 알려야 한다. 또, 연구 결과를 대상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동시에 연구 대상의 개인 정보는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 진행되는 모든 연구를 통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디지털 자료는 일반 문서보다 도용당할 위험이 크다는 점에서 연구 대상의 개인정보가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인류학협회는 디지털 인류학자들에게 온라인 자료 수집 시에 연구자로서 연구 참여자의 신상을 보호하는 데에 책임을 다할 것을 권고했다.
인류학자, 세계를 예측하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여러 기업에서도 디지털 기술과 소비자들의 관계에 주력하기 시작하며, IBM,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IT 기업이 인류학자들의 일터가 되었다. 기업 내의 인류학자들은 연구소에 앉아 제품을 설계하기보다는 인류학 연구를 진행하듯 현장에 나가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술과의 관계를 분석한다. 미국의 최대 규모 반도체 제조기업인 인텔은 인류학과 사회과학의 가치에 주목하며 약 100명의 학자로 이루어진 ‘인텔 랩’을 운영하고 있다. 인텔 랩의 연구원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기술을 소비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호주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인 제네비브 벨은 인텔 랩에서 상호작용및경험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상호작용및경험연구소는 인텔의 신기술과 제품이 소비자의 필요를 효과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벨 소장은 문화인류학적인 시각으로 기술에 접근해 인텔이 일상에 편의를 제공하는 신제품을 개발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몇 해 전 벨의 연구팀은 가정에 설치된 컴퓨터가 자녀의 학업을 방해한다고 여긴 한 부모와 면담한 후, 정해진 시간 동안 자녀의 컴퓨터 게임 접속을 막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인텔 데이터 센터의 관리자인 다이앤 브라이언트에 따르면 연구팀은 인텔 내에서 가장 먼저 스마트폰 시대의 도래를 예측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인텔 경영진은 기존의 반도체 산업에만 집중했고, 급격한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인텔은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활발히 반영해 ‘웨어러블 컴퓨터’ 및 초소형 로봇 등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벨 소장은 과거 종교 의식 때 성수를 흐르게 하는 기계가 사용되었다는 사실과, 여행 중 휴대전화로 메카의 방향을 파악하는 이슬람교도 소년을 만난 경험을 언급하며 “첨단 기술은 직장이나 집을 벗어나 종교의식 등 우리 생활의 전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뒤이어 소장은 “첨단기술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첨단기술에 의한 변화를 선택하는 것”이라며 디지털 인류학이 실생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인류와 디지털 기술 간의 밀접한 관계를 연구하는 데에서 시작한 디지털 인류학은 오늘날 인류의 생활 전반을 들여다보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역사의 학문은 무궁무진한 응용력과 함께 개인의 정보 도용 위험 등 윤리적인 위험도 보여주기도 했다. 디지털 인류학을 통해 얻어낸 연구 결과를 우리의 삶에 어떤 방향으로 적용할지는 인류학자들의 몫이다. 벨 소장의 말처럼 우리가 첨단 기술이 가져오는 변화에 대한 선택권을 계속 쥐고 있기 위해서는, 디지털이 만들어 낸 일상의 편리함과 연구 방법에 따른 윤리 지침 사이에서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Digital Anthropology>, Daniel Miller, The Cambridge Encyclopedia of Anthropology
<순간과 영원으로의 여행, 영상인류학의 시작>, 이토 도시하루, 민속원